Proclaim liberty

공동체의 균형감각[나눔] 본문

나눔

공동체의 균형감각[나눔]

마당노리 2016. 2. 16. 23:06


갈라디아서 5장 13절 

형제자매 여러분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자유하게 하셨습니다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1.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_은혜 vs 행위


사도 바울이 전도해서 공동체를 세웠던 갈라디아 지역에는 심각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문제였는데, 할례와 음식법, 절기에 대한 것들이었습니다.

초기 복음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거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 유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유대교와 다르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교의 연장, 유대교의 완성이란 개념 위에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선민의식'일 것입니다. 혈통적으로 선택받았고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지키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은 정결하고 이방인은 부정하다는 것이죠. 그렇게 구별된 중요한 상징이 율법이었고, 그 율법의 중심에는 '할례'가 있다고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신체적으로 흠집을 냄으로 자신은 이방인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는 이들의 중요한 딜레마가 있습니다. 율법을 모두 지켜야 하는데, 모세의 율법 뿐만 아니라 장로의 전통까지 수 천 개의 지키려고 애를 썼던 그들이지만, 실제로는 그 누구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며 동시에 해방이기도 했습니다. 

율법의 무거운 짐 위에서 해방된 유대인 기독교인들이었는데, 이제 다시 비유대계 기독교인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매우 예민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 은혜로 구원받는 것인가,

예수를 믿더라도 결국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 것인가

의 문제입니다.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내부에 구원을 이끌어 낼만한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이고,

율법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노력, 행위, 조건들이 구원에 반영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인 요인이 될 수 없고, 예수가 굳이 그리스도로 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구원받는 것도 능력있는 사람, 조건이 되는 사람만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양단의 문제가 발생되기 쉬운데,

 은혜로 받은 구원이 너무 쉽고 값싼 구원이 되어서, 구원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방탕, 방종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이 발생할 수 있고,

 은혜로 구원받았음에도, 또다시 눈에 보이는 절차와 의식들로 사람들을 만족시키려고 하고, 규율들을 만들어서 구원의 요건인 것처럼 요구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국가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문화도 아니고 다원화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주변에는 성경적인 기준으로 살아가느냐에 대한 고민보다, 경쟁에서 살아남고 성공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성경적 기준을 따질 겨를조차 없습니다. 신앙을 가졌다는 사람들도 주일성수, 술담배, 십일조 같은 몇 개의 라인만 지키고 있습니다. 

믿음이 성숙하게 된다는 것은, 교회에서 주관하는 예배와 교육훈련, 사역프로그램에 많이 참여하게 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많이 참여할 수록 믿음이 점점 자라고 성숙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참여율이 높지 못하면 죄책감마저 듭니다.

이런 복합적인 환경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 개인과 공동체의 방향을 놓치지 쉽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5~16절에서 말합니다.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표준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자비가 있기를 빕니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자국을 지고 다닙니다.  





2. 새 사람 vs 옛 사람의 갈등


은혜를 방종의 기회로 삼아버리고,

죄의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다시 율법의 속박 속으로 끌어들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 하나, 새롭게 창조된 존재가, 옛사람의 기준, 인간적 욕망의 기준을 따라 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무 것도 거리낌 없이 방종하게 살면 자유로운 것 같지만, 그것은 자신의 정욕에 속박된 것입니다.

율법 속에 살면 자기가 잘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자기 만족에 속박당한 것입니다.

방종하든 율법대로 살든, 모두 인간적인 욕망에 속박된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마당넓은교회는 '변혁사역체험학교(줄여서 변사체)'에 대한 논의를 했었습니다. 첫 회의니 기대를 내려놓고 회의에 임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제 맘 같지 않아서 실망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 많은 생각을 하면서 제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처음에는, 마당넓은교회를 이렇게 잉태단계부터 시작한 주된 이유가 변혁사역 때문이었는데 그 첫 단계부터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걱정도 되고, 또 하필 저랑 동일한 시기에 개척한 교회는 재정적으로나 인원, 사역적으로 안정되게 가는 것을 보면서 부럽기도 했습니다. 

착잡한 마음으로 기도하던 중  제 자신을 보게 됐습니다. 이 부분 역시 성공주의의 다른 모습임을 알게 됐습니다. 변혁사역을 한다는 좋은 허울로,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되지도 않았고 함께 갈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인데도, 밀어붙이고 이 사역에 동참하지 않으면 자책하게끔 하려는 이 모습은, 우리는 이런 사역을 한다고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음을 깨닫게 됐습니다.  


우리는 진리 안에서 해방된 존재입니다. 해방되었다는 것은 율법과 정욕에서 구출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특히 마당넓은교회에 매우 중요한 영감을 주는 책이라 생각돼서 한 부분을 발췌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대신, 교회 자체를 세우는 존재로 자신을 규정짓게 되면 언제나 문제가 생긴다.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여러 가지 활동, 즉 종교적인 행위와 신령한 것들에만 신경을 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여러 가지 활동, 즉 인간의 모든 행위와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말물에 신경을 쓴다.

교회에 속한 사람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느냐를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세상으로 내보내느냐를 생각한다. - 참으로해방된교회, 하워드 슈나이더 




균형감각을 갖는 것, 균형감각을 갖고 나아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 같습니다. 형식(제도)과 내용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어렵습니다. 방종없는 자유, 무겁지 않은 규율의 균형이 어렵습니다. 탈진하지 않고 즐겁게 사역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요즘 예민하게 떠오르는 주제가 '목회자의 비전이 교회의 비전과 동일한가'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시각에서 옳다고 성경적으로 다 옳고 교인들도 무조건 동의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가 되는 것이죠.   

복음이 영적인 구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도록 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유지한다면, 우리 마당넓은공동체는 더디가더라도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 

'나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즐거운 반딧불이' 이야기[나눔]  (0) 2016.02.29
공동체의 방향_통일성[나눔]  (0) 2016.02.23
공동체의 mood[나눔]  (0) 2016.02.10
바벨탑과 선택  (0) 2016.02.02
공동체의 내적방향_나눔 [나눔]  (0) 2016.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