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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방향-REDEEM[나눔]

마당노리 2016. 1. 26. 22:20


한 기독교 단체에서 '교회 오는 이유'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정확성에 대해서는 염두에 두지 마시고, 간단하게 참고만 하면 되겠습니다. 그 이유들을 보면, 마음의 평안과 구원, 영생, 현세적인 복 등이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사람들을 만나서 물어보면, 첫 두 개의 이유는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만약, 신앙생활을 함에도 이 부분들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교회 올 이유들이 줄어드는 것이겠죠. 결국 사람들이 이런 것을 원한다면, 교회 공동체가 지향하는 방향이 이 내용들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사도행전에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자연적으로 만들어져 가는 교회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은 모두 유대인으로서, 유대교인이었기 때문에 교회를 만들겠다든가 기독교가 되겠다든가 하는 것에 대한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교회 공동체가 형성되는데, 이 내용은 마당넓은교회를 준비하는 우리의 방향성과도 중요한 관계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2~3장에는 연속된 사건들이 있습니다.

① 사도행전 2:40~42. 복음을 전하고 성찬을 나누는 모습: 현대와 비교해도 일반적인 교회의 모습과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② 사도행전 2:44~45. 공동소유, 공동분배: 초대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자주 표현됨

사도행전 3:1~8. 성령의 능력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킴. 요즘도 많은 교회들이 초자연적인 일들만이 성령의 능력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공동체에 일어났던 이 이들은, 그들에게서 처음 있었던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했던 사역들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사역들을 보면,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을 고치셨습니다.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 나라가 왔음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는 이렇다고 가르치신 것이고,

병을 고치신 것은,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회복되고 완전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역이, 예수님께서 떠나시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을 통해서 일어났고, 이제는 사도성을 이어받은 교회를 통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상황과 사건은, 그냥 각각의 우연적이거나 독립적인 상황들이 아니며, 예루살렘 공동체에서만 독특하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복음이 닿는 곳에서 이런 사역들이 일어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적인 어려움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역들은 초대교회 전반에 일어난 것 같긴 합니다. 그러나 오래 지속되진 못한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공동체의 경우만 보더라도, 구제 사역이 이뤄질 때 히브리 유대인 여성들에게는 비교적 많이 분배되었던 반면 헬라파 유대인 여성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 분배 문제로 갈등이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소유를 팔았지만 교회 앞에 자신들의 명예가 드러나기를 원해서 일부만 헌금하면서도 전체를 헌금했다고 속였습니다. 그날 결국 둘 다 죽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 공동체 내에서 경제적인 상황에서, 굶고 빚지는 일들은 없었지만 예루살렘 공동체는 대체로 가난한 편이었고, 점차 공동소유, 공동사용 문화를 사라진 것 같습니다. 


이제 문제는, 현대 교회들도 동일하게 공동소유와 공동사용 문화를 주장하거나, 치유 사역이나 초월적 방법을 주장해야 하는 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가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싶다고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치유하고 회복하는 방향성은 계속 유지해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네바 도시는 가난과 혼돈의 도시였다. 1536년 칼빈이 그 도시로 부임한 이후, 1540년대 중반부터 프랑스 난민들이 몰려들어오기 시작했다. 1538년에는 도시의 인구가 12,000명에 불과했으나, 10,000여 명의 피난민과 가난한 사람들과부와 고아들그리고 병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제네바 시는 이러한 피난민들을 위하여 기관들을 세우고환자와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을 수행했는데그 때 칼빈은 교회의 역할과 정부의 역할을 균형있게 적용시키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사회를 회복시키는 일을 감당했던 것이다.

당시에 제네바 시가 겪어야 했던 그러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칼빈은 그것을 정부의 책임이라고만 보지도 않았고 또한 교회의 역할로만 해결하려고 하지도 않았다제네바 시의 사회적 문제를 접근함에 있어서정부차원에서는 종합 구호원과 난민 보호소를 설립하여 운영하게 함으로그리고 교회에서는 집사직에 대한 업무와 규정들을 재정립하여 섬김과 봉사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했던 것이다이렇게 두 기관이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제네바시의 사회적 문제가 극복되고 새로운 모습으로 세워지도록 방안들을 제시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종합구호원이나 난민보호소와 같은 공공기관에서 실제로 봉사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집사들이었는데그러한 교회의 대사회적 책임 수행의 배경에는 칼빈의 신학적 작업이 기초가 되었다.

교회의 집사의 역할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교회의 내적인 업무들로만 제한되지 않았다로마카톨릭에서 이해해 온 교회 집사직이란 성직자를 보조하거나 교회 예식을 돕고 행정적인 업무들을 수행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칼빈은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개혁주의 신학서론, 97-99, 2016. 2. 개정판 예정김광열]


  SNS에서 제가 팔로우하는 있는 분이 게시한 글입니다. 종교개혁을 했던 칼빈이 했던 사역과, 교회의 집사 직분자들의 사역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여러분,

현대 물질문명이 발달한 도시교회에서, 초자연적인 이적은 별로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병원과 복지센터와 정부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계속 일하십니다. 

교회는 그 어느 것도 그들보다 전문적이지 못하고,

그들과의 관계에서 정체성이 애매해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모두 온전하게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이며, 교회의 방향성이어야 합니다. REDEEM 사역은 단지 죽어가는 영혼을 교회로 인도하는 데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우리 마당넓은공동체는 주중에 사용할 수 있는 공간도 없고, 교회 간판도 없습니다. 알려지기 어렵고 양적으로 부흥할 가능성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분 때문에 위축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많은 교회들이 복음 전도에 힘쓰고 있으니, 그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과 관계와 직업과 경제적인 부분과 비전과 인생의 목적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회복할 수 있도록 같이 고민하는, 우리같은 방향성을 가진 교회가 몇 개쯤 있어도 될 것 같습니다.   




공동체의 방향_REDEEM from madang on Vim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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