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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복[나눔]

마당노리 2016. 1. 6. 00:20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란 것이 있더군요. 들어보셨을 텐데 이런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소련 철도국 소속이었던 한 남자가 늦은 저녁 냉동차 속에서 일을 하는데 그만 문이 외부에서 잠겨 버렸습니다. 냉동차 안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너무 늦은 시각이라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밤새 냉동차 안에 갇혀있던 남자는 결국 구조되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냉동차 안의 벽에는 남자가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몸이 차가워 온다. 그래도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차츰 몸이 얼어온다. 이제 정신이 몽롱해진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냉동차의 냉동기는 고장이 나 있었고, 냉동차 안의 온도도 섭씨 14도 정도였다고 합니다. 환기구도 있어서 충분한 산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건 속에서 그가 죽은 이유는 놀랍게도 '동사(凍死)'였다고 합니다. 


노시보 효과는 외부적 요인 없이 부정적인 심리가 인간의 신체 혹은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하는 용어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힘든 상황 자체보다, 두려움이 더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네 삶이란 분명 힘든 관문들의 연속입니다. 통과해야 하는 관문들이 퀘스트처럼 이어집니다. 힘겨운 상황은 우리가 죽어야 함께 끝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확실하고 불안정적인 상황을 마주하는 '두려움'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갈구하게 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초점을 왜곡시키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수 있는 복은 누리지 못하고, 엉뚱한 복을 찾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전제되는 것이며, 단순히 좋은 결과만을 바라는 것은 우리가 추구할 것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시대적으로 지리적으로 매우 동떨어져 있지만, 상황적인 면에서는 그리 다르지 않은, 2000년 전 이스라엘의 가난하고 힘겨운 사람들 앞에 서셨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부유하지 못하고, 하루 끼니를 모두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누가복음 6장

20.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21.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내어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럴 때에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공동번역] 


"너희는 참 행복하다. 

가난하니 행복하고, 굶주리니 행복하다. 슬픈 일이 많으니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행복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의 팔복에 나오는 그 용어와 동일한 것입니다. 한글성경으로 번역된 '복'이라는 단어로 사용된 것 중에서 예수님께서 주로 사용하셨던 단어입니다. 일반적인 외형적 복이 아니라 내면적인 복입니다. 행복감이 가장 충만하고 특히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이 겉으로 볼 때는 복처럼 안 보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힘겨운 중에서 신앙을 지키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 때문에 모욕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것'이 복이라고 했습니다. 



반면, 세상이 운영되는 대부분의 문화와 방식은 이 땅에서의 성공과 풍요가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해서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늙어서 고생 안하고 살려면 젊을 때 더 많이 벌어야 한다고 합니다. 지금 당장 쓸 돈도 없는데 미래의 수십 년을 버텨야 한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갖게 되고, 준비되지 못하면 비참하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을 것 같다는 집단적 두려움이 전세계를 관통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시선을 빼앗고 관점을 왜곡시킵니다. 

그런 준비 자체가 잘못 됐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만 매몰됨으로 인해 갈팡질팡하고,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방향성과 할 일이 왜곡되고 위축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진정 두려워 할 것이 아닙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 10:28)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힘겹고 지치고 불안정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불안정함을 이길 힘을 주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요 14:27)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복입니다. 

두려울 수 있는 상황에서 평화를 누리는 것.

이것은 성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 최면도 아니고, 경험과 능력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내면에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각과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막아주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한 만큼을 채워주십니다. 


마태복음 6장

25.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26.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는 어찌하여 옷 걱정을 하느냐?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30.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31.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가난이 뭐가 행복하겠습니까. 배고프고 슬픈데 뭐가 행복하겠습니다. 

그 자체가 행복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가난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배고프고 슬프면 하나님의 위로를 얻을 수 있고, 그 도우심와 위로로 버틸 수 있으며, 곧 완전한 위로를 주실 것이라 약속하셨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위로가 없어도 될만큼 넉넉하고 기쁘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안에 있음으로, 세상의 어떤 위협과 속임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행복을 풍성히 누리는 마당넓은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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