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claim liberty

특별함 없는 특별함 [나눔] 본문

나눔

특별함 없는 특별함 [나눔]

마당노리 2016. 4. 5. 14:52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이 쓴 '너는 특별하단다'라는 동화를 아실 것입니다.

엘리라는 목수가 만든 나무인형 마을의 이야기입니다. 그 마을에서는 매일매일 서로에게 스티커를 붙여주는 것이 중요한 일과입니다. 착한 일이나 뛰어난 일을 하게 되면 금별 스티커를 붙여주고, 말썽을 피우면 꺼먼 스티커를 붙여줍니다. 금별 스티커를 많이 붙일수록 존경과 부러움을 받습니다. 대부분은 금별 스티커도 있고 꺼먼 스티커도 있죠. 그런데 판치넬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마음은 여리고 착함에도 불구하고 늘 실수와 말썽만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온통 까만 스티커만 잔뜩 붙이고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그 마을에서 엄청나게 커다란 금별 스티커를 받을 수 있는 이벤트를 하게 됩니다. 판치넬로도 무언가 잘하는 것을 찾아서 금별 스티커를 받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동네에서 까만 스티커가 더 많은 친구들이 판치넬로를 도우려고 했지만, 그들마저 포기하게 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판치넬로는 엘리 목수 아저씨를 만나게 됩니다. 목수 아저씨는 금별 스티커가 하나도 없는 판치넬로에게 매우 다정하게 대해 줬습니다. 그런 스티커 때문에 상처 주고 상처 받고 우쭐대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줬습니다.

판치넬로는 곧바로 이해하진 못했지만, 조금씩 엘리 아저씨의 말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붙어있던 추하고 까만 스티커들이 하나씩 둘씩 떨어져 나가고 점차 자유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깊이, 건강하게 사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정도는, 하나님을 사랑할 때, 타인을 사랑할 때 반드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정도는 한 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차곡차곡 누적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사랑받을만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특별함'의 문제와 연결해서 보도록 훈련받아 왔습니다. 특별함이란 '경쟁력 있는 조건'이라고 생각들 합니다. 먹고 살만한 기술이 있거나, 콘테스트나 경기에 나갈만한 재능이 있어야 특별하다고 여기는 것이죠. 우리는 주변 사람들의 반복된 칭찬과 격려를 들으면서 특별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밖에 나가면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고, 그나마도 가장 가까운 가족들로부터 격려는 커녕 자신에 대한 경멸감만 갖게 되기도 합니다.

 

 

 

베드로전서 2

7. 그러므로 이 돌은, 믿는 여러분에게는 귀한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집짓는 자들이 버렸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이요,

8. 또한 "걸리는 돌과 넘어지게 하는 바위"입니다. 그들이 걸려서 넘어지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요, 또한 그렇게 되도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9. 그러나 여러분은 택함을 받은 민족이요, 왕의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국민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매우 특별하고 존귀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것을 4가지로 표현했습니다. 택함받은 민족, 왕의 제사장들, 거룩한 국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1. 택함받은 민족

초대 교회 당시 분위기상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새로운 족속처럼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고, 혈통을 따라 묶인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묶여진 것입니다.

2. 왕의 제사장들

이 표현은, 왕족이며 동시에 제사장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족이며 동시에 제사장이었던 사람은 멜기세덱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특히 제사장 직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은 성전 뜰도 밟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믿음의 자녀들 속에 하나님이 있으니 누구도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3. 거룩한 국민

이것은 성품과 관련된 용어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되었다는 것인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닮아 더욱 거룩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함께 섞여 살기 때문에 외모로는 전혀 구분이 안되더라도, 그의 내면은 하나님처럼 더욱 고귀하고 존귀하게 되어가게 되었습니다. 

4.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소유'라는 단어는 우리나라 말로 다양하게 번역이 가능한데, 보관, 보존, 획득, 특별한 소유, 특수성 같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매우 특별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이 4가지는 우리의 신분이며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신분에 대한 느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내면의 확신이나 느낌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특별함이, 우리가 가진 무언가에 있다면 그것이 깨져버릴 때 특별함도 같이 깨지게 됩니다. 매우 불안정한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진 것과 상관없이 우리를 특별하다고 확정하셨습니다.

 

 

 

 

신분이 변하고 정체성이 바뀌면, 삶의 목적과 방향이 달라지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부여받은 임무가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의 업적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본문의 내용은, 출애굽기와 이사야서, 말라기서에 있는 내용을 인용한 것입니다. 특히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몰골을 상상해 보길 바랍니다. 그들은 오랜 시간 이집트의 노예였습니다. 부모도 노예였고, 그 부모의 부모도 노예였습니다. 뼛속 깊이 노예였습니다. 못 배우고 비굴하고 초라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향해 '너희는 특별하다, 너희는 내 소유다, 내 제사장 나라가 돼라'고 했을 때 그들에게 피부로 와 닿았을까요?

사도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던 당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A.D. 2세기 전후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핍박과 박해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그 한가지 이유로 죽임을 당하고 재산을 몰수 당하고, 어제까지 옆짚에서 알던 사람이 밀고하면 끌려가는 시대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얼마나 두렵고 낙심해 있었을까요.

사도 베드로는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조금만 더 인내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의 신분과 임무를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신분을 주신 것은, 우리가 받을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업적을 선포한다는 것은,

우리의 특별함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특별하게 하신 이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유념해서 봐야 하는 것이 있는데, 9절의 앞뒤의 내용입니다.

 

7. 그러므로 이 돌은, 믿는 여러분에게는 귀한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집짓는 자들이 버렸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이요,

8. 또한 "걸리는 돌과 넘어지게 하는 바위"입니다. 그들이 걸려서 넘어지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요, 또한 그렇게 되도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 믿는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약육강식의 세계,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다른 사람을 밟고 일어서도록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역할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본문을 볼 때, 세상 모든 사람이 고생하더라도 나만 신경써 주리라는 내용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당넓은교회 가족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매우 특별하고 존귀한 존재로 받아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큰 사랑과 보호를 받고 있으며 이 순간에도, 앞으로도 그 사랑과 보호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돈을 많이 벌고 병이 다 낫고 타인보다 앞서나가는

그런 종류의 보호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하나님과 다시는 원수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온 특별한 느낌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총에 맞아서 총알을 몸 속에 지니고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처음엔 아프고 불편하지만 나중엔 아픈 것을 견디는 것에 익숙해서 그것 자체로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익숙함(편함)이 옳은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느낌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자신감과 좌절감 사이에서 널뛰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익숙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가시는 그 실체의 우리가 아닙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우리는 그런 종류의 생각을 부정해야 합니다.

반면 생소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분을 바꿔주셨다는 것에 우리는 전적으로 동의해야 합니다. 그 생각을 자주 떠올려야 하고 묵상하고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능력과 조건에 따라서 나를 보는 방법이 익숙하더라도 그 익숙함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꿔주신 그 특별함을 긍정하는 우리가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