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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에게서 찾은 감사의 이유[나눔]

마당노리 2015. 12. 8. 20:59

이번 나눔은 추수감사절에 나눴던 내용인데, 너무 늦게 올리고 마는군요.

 

로마서 7장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23.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24.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그림의 출처는 잊어버렸습니다;;

위 그림은 각 연령별로 갖게 되는 스트레스의 종류가 나타납니다. 통계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자살을 시작(?)하는 연령이 11살이라고 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넘어가면 학업스트레스로 인해 벌써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이죠.

청년들은 요즘 우리나라를 보면서 '헬조선', '불반도'라고 한다는군요. 단지 먹고 살기 힘들다는 정도를 넘어서, 삶을 꾸려나가기조차 어려워지고,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한다는 좌절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각 가정마다, 각 사람마다 스트레스의 원인들은 조금씩 더해지고 빼지고 하다보면 조금씩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강요된 신앙'이 현대 크리스천들에게 또하나의 스트레스가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어쩌면 '감사'가 아닐지. 너무 비약이라 생각될 수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마땅하고, 감사가 많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좀 더 행복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 것 같습니다. 크리스천이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감사해야 한다고 하니, 감사절기만 되면 감사할 이유를 찾아 쥐어짜는 모양새입니다. 

그나마 생활도 궁핍하고 마땅히 감사할 이유를 찾지 못하면, 마지막 카드는 역시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가 등장합니다. 물론 감사할 이유임에는 분명하지만, 언제까지 다른 감사할 것은 별로 없고, 구원의 감사만 할 것인지 안타깝습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에는 사도 바울의 감사가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유대인들 중에서 감사 지수가 가장 높은 부류였을 것입니다. 풍요로운 환경과 지위, 로마 시민권자로서의 자유, 랍비 교육을 받은 자로서의 우월감,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는 만족감 등 행복감이 높았을 것입니다.

외면적으로 보면,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그의 삶은 완전히 곤두박질 쳤습니다. 저주스런 형벌을 받은 예수를 따르다가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지탄과 탄압을 받아야 하는 것부터, 경제적인 부분까지 녹록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참 많은 감사를 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감사한다'는 표현이 60여회 등장하는데 그 중 40회 이상이 바울서신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감사합니다.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건져 주신 하나님께,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의 감사가 좀 묘합니다. 

 

24.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감사를 하기 직전의 표현에서 그는 '비참하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는 마음이 복잡한 것 같습니다. 매우 분열적인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는데, 스스로 의롭고 선하고자 하나, 자신 속에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괴로움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참한 지점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결국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고,

자신에게 붙은 악을 떼어내게 됨도 아니고,

자신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수준으로 성숙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자신의 이런 모습에도, 여전히 무능력함에도,

여전히 용납하시고 사랑하시고, 결국 하나님의 힘으로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핍박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37.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죄가 얼마나 큰 지 이해하는 만큼, 구원의 감격이 커집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서만 죄를 찾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잘 알지 못합니다.

 

여전히 죄의 영향력 아래 신음하고 있는 세상을 보십시오.

프랑스 파리에서 대규모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15만 명이 서울광장에서 모여 집회를 하고, 경찰은 시위대에게 최루액을 뿌려댔습니다.

온 세계가 죽음의 공포 속에 있고, 온 나라가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런 상황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현실을 외면하고 그저 우리 개인의 영적인 문제와 환경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반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의 모든 고통과 싸워나가고 있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근원적으로 영혼부터 삶의 모든 환경에 완전함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드러내고, 부분적으로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감사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성숙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기도했더니 원하는 것이 이루어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제 나도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찾아온 것은,

그가 이미 예수를 믿었을 때가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를 이미 죽이고 예수 믿는 공동체를 깨트리기 위해서 가던 길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함께 하는 것이 가장 기쁜 일이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매순간, 매일의 시간이 쌓였을 때,

우리 속에, 우리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성장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마당넓은교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