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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의 시작, 아브라함[나눔]

마당노리 2015. 11. 19. 21:21

창세기 12장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3.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4. 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나이는 일흔다섯이었다.

5.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재산과 거기에서 얻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길을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6. 아브람은 그 땅을 지나서, 세겜 땅 곧 모레의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 때에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그런 그의 명성에 걸맞는 믿음의 사건들이 있었습니다.100세에 아들을 낳고, 그 금쪽 같은 아들을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하실 때 두 말 않고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의 대단한 믿음에 주눅이 들고, 따라가기엔 너무 위대해서 엄두를 내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바빌로니아 '우르'라는 지역 출신입니다. 노아 홍수 후 노아의 자손들은 정착할 곳을 찾아 떠났고, 넓은 평지에다 홍수의 위험성이 적고, 문명이 발달하기 최적의 장소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다. 그곳이 우르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인류 구원의 계획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가신 것은, 노아 홍수 후 최소 360 ~ 490여 년 정도가 지났을 때였습니다. 우르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대신 우상을 만들어내서 섬기고 있었고, 아브라함 집안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인류 구원 계획을 시작하시려는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의 존재조차 모르는 아브라함이었기에, 하나님은 매우 강렬하게 등장하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정하시는 곳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친척끼리 서로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족의 안전이 위협되더라도 아브라함은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빌로니아에서 가나안까지는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였습니다. 사막과 산맥을 가로지르지 못하기 때문에 거대한 U자를 그리며 우회할 수밖에 없는 여정이었습니다. 그 길을 아브라함과 아내, 조카와 아버지까지 모시고 간 것입니다. 결국 가나안에 바로 들어오지 않고, 국경 근처의 하란에서 꽤 오래 머물게 되었습니다. 하란에서 아버지가 죽은 후, 또다시 나타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재촉했고, 그들은 마침내 가나안으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 만들어질 땅이었지만 아브라함의 삶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주변 부족의 위협과 극심한 가뭄, 가능성 없어보이는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을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믿음을 지켜냈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뤄내고야 말았습니다. 

역시 하나님은 이런 사람 정도 돼야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아브라함의 성실함과 신앙심을 발견하고 그를 끌어내신 것 같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이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쓰임을 받으려면, 성실함이 되었든 신앙심이 되었든, 무모할 정도의 용기나 순종이 되었든, 뭔가가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효율성을 생각한다면, 노아 홍수 이후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전에 사람들에게 나타나시는 것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그것도 적당한 시기마다 나타나셔서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사람을 선택하더라도 바벨론보다는 가나안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더 쉬웠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탁월했는가를 본다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는 매우 겁이 많아서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속일-실제로는 속인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아내를 외간 남자에게 넘긴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정도였고, 사람 됨됨이를 생각한다면 이집트의 바로나, 그랄 왕이 더 상식적인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처음부터 신뢰했는가 하면 그것도 전혀 아닙니다. 그는 롯, 자신의 종, 나중엔 이스마엘을 자신의 상속자로 생각했고, 이삭을 임신하기 직전까지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5절에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힘든 여정을 견뎌내고 마침내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뤘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끌고 끌어서 마침내 가나안에 밀어넣었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획하셨고, 그가 즉각 반응할 수 있는 가장 알맞은 방법으로 찾아가셨고, 그가 멈칫거릴 때에도 기다려주시고, 다시 일으켜주시고,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에 들여보내셨습니다. 그의 성장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혹은 들어간 직후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의 평생을 거쳐 성장시키고 마침내 그를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마침내'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평생에 걸쳐 일어난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은, 기독교는 죽어서 천국가는 것만 목표라고 생각하고, 그러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우리가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천국을 가긴 가야겠는데 믿어지진 않고,

확신을 가져야 한다니 마인드콘트롤에 세뇌하는 것처럼 애를 씁니다.

믿은 이후에도 여전히 열심히 해야 하는 부담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거나, 극히 작은 일부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류를 보면서, 인생을 보면서, 인간의 모든 노력이 결국은 어긋난 방향으로 향하고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유토피아는 올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함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시하는 길이 진정한 행복임을 인정하고 수용한 사람이,

진리에 대해서 더 알아가고,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내가 전혀 알기 전부터 이미 내 삶 속에 깊이 관여해 오셨던

그 하나님이 배후에 계시며,

마침내 내가 지금 믿음의 자리로 오게 하셨듯이,

마침내 그의 나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정의 시작, 아브라함 from madang on Vim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