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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베이스, 다윗 왕[나눔]

마당노리 2015. 11. 25. 23:49

사무엘하 7장

1. 주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원수에게서 다윗 왕을 안전하게 지켜 주셨으므로, 왕은 이제 자기의 왕궁에서 살게 되었다.

2. 하루는, 왕이 예언자 나단에게 말하였다. "나는 백향목 왕궁에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아직도 휘장 안에 있습니다."

3. 나단이 왕에게 말하였다. "주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시니, 가셔서, 무슨 일이든지 계획하신 대로 하십시오."

4. 그러나 바로 그 날 밤에, 주께서 나단에게 말씀하셨다.

5. "너는 내 종 다윗에게 가서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지으려고 하느냐?

6.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집에서도 살지 않고, 오직 장막이나 성막에 있으면서, 옮겨 다니며 지냈다.

7. 내가 이스라엘 온 자손과 함께 옮겨 다닌 모든 곳에서,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을 돌보라고 명한 이스라엘 그 어느 지파에게라도, 나에게 백향목 집을 지어 주지 않은 것을 두고 말한 적이 있느냐?'

8. 그러므로 이제 너는 나의 종 다윗에게 전하여라.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삼은 것은, 바로 나다.

 

9. 나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언제나 너와 함께 있어서,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쳐 주었다. 나는 이제 네 이름을,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들의 이름과 같이, 빛나게 해주겠다.

 

 

다윗왕은 이스라엘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왕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리는 회복의 시대는 다윗왕의 시대, 그 시대의 영광입니다.

 

사진(출처: 바이블웨이)은 사울왕 시대의 영토입니다.

 

다음 사진(출처: 바이블웨이)은 다윗 왕 시대의 영토입니다.

 

솔로몬왕 시대의 영토가 더 크긴 했지만 그 기반은 분명 다윗왕에게 있습니다. 탁월한 정치력과 용맹함, 사람을 향한 따뜻한 마음과 의리,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에서 다윗은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는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왕을 발굴해 내신 것이죠. 아직 사울왕이 왕위(王位)에 있고 다윗은 목동이었던 시절, 형제도 부모도 사무엘 선지자도 다윗을 눈여겨보지 않던 시절에 하나님은 다윗을 차기 왕으로 지목한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듯이, 다윗은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언약'의 시작부분입니다. 성경에는 매우 다양한 주제가 나오는데, 그 중 가장 크고 중요한 두 개의 주제를 말한다면 '하나님나라'와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담을 시작으로 사람을 세우셨고, 그들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왕과도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배경을 보면, 하나님을 향한 다윗왕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다윗왕은 왕궁을 건설해서 궁에 살고 있었습니다. 다윗왕이 사는 왕궁은 백향목으로 지은 것인데, 백향목은 이스라엘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쭉쭉 뻗은 백향목은 100퍼센트 수입입니다. 그 정도로 멋있는 왕궁이고 풍요로운 왕국인 것이죠. 그런데 보니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법궤는 성막-말이 성막이지 허름한 천막입니다-안에 있는 것이 매우 죄송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지을 궁리를 합니다. 나단 선지자도 왕의 마음을 아는지라 왕의 계획을 추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날밤 급하게 선지자를 부른 하나님은 다윗왕의 계획을 막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왕이 전투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고 역대상 22장에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 이유 말고도 추가적인 이유들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선은 '성전'이라는 건물에 대한 것입니다. 당시 고대근동지역의 왕들은 왕이 된 후 신전(神殿)을 짓습니다. 신전의 크기와 화려함은 왕권을 나타냅니다. 다윗왕이 주변 나라들을 점령한 후 조세를 받았을 것입니다. 점령할 때에도 타국을 많이 다녔을 것입니다. 그리고 왕궁과 신전을 봤을 것입니다. 크고 화려한 신전들을 보고 하나님께도 그런 신전을 지어 드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왕권에 어울리는 성전으로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신전보다는 '성막'을 원하셨던 것은 하나님의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성막의 중요한 기능은 '이동성'입니다. 광야를 지나올 때, 성막이 움직이면 이스라엘은 따라 움직이고, 성막이 머물면 이스라엘은 성막 주위에 머물게 됩니다. 성막은 이스라엘을 앞장서 갑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도성입니다. 그런데 성전은 고정돼 있습니다. 이젠 사람이 원하는 때 하나님을 거기서 만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법궤를 보는 것은 대제사장에게만 제한되지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언제든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머무는 곳'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충심을 압니다. 그럼에도 다윗의 마음 속에 있는 욕망과, 성전이라는 건물이 갖는 위험성을 함께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윗의 마음 속에 있는 '채무의식'을 말씀하시고 싶어하십니다.

신(神)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가나안종교는, 신과 숭배자 사이에 계약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물론 신이 요구한 것은 아니고 인간이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죠. 신도 그것을 원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 겁니다. 인간이 신에게 정성을 다하면, 신이 감동을 받아서 인간에게 좋은 것을 준다는 관계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본능인 것 같습니다. 타자를 대하는 방식인 것 같습니다. 만약 신에게 정성을 다했는데도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면, 신이 노했거나, 신에게 더 큰 정성을 드려야 하거나, 아니면 그 신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가나안종교 뿐만 아니라, 로마 종교도 그렇고, 기독교(유대교, 천주교 포함)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다 그렇습니다. Give and Take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다윗왕의 관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일방적인 은혜'를 베푸시지, 그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궁색하거나 구차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그의 백성이 하나님보다 먼저 무언가를 바친다고 하더라도 채무의식을 갖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다윗왕은 이제 하나님께 뭔가를 드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왕에게 옛일을 상기시키십니다.

 

 

 

 

다윗의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사실 우리는 더하죠.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기 위해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립니다. 그것이 기도가 됐든, 헌금이 됐든, 작정기도가 됐든. 지성을 바치고 정성을 드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감동해서 주실거라고 생각합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을 박제화된 우상으로 만들어버리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의 영성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