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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할 수 없는 유혹, 힘 - 우리는 발전하는가 [나눔]

마당노리 2016. 12. 6. 23:29

대통령과 비선실세로 인해 나라가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도교 내부에서는 두 개의 목소리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은 그저 조용히 기도만 하면 된다는 소리와 기독교인도 광화문으로 나가야 한다-기독교인도 정치적 발언을 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과연 서로 다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두 주장은 서로 배치되어왔습니다. 이번 나눔은 시리즈로 묶지 않고, 한 주 한 주 묵상한 부분을 가지고 나누고자 합니다.


창세기 417~26

17. 가인이 자기 아내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 그 때에 가인은 도시를 세우고, 그 도시를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하였다.

18. 에녹은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다.

19. 라멕은 두 아내와 함께 살았다. 한 아내의 이름은 아다이고, 또 한 아내의 이름은 씰라이다.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는데, 그는 장막을 치고 살면서, 집짐승을 치는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인데, 유발은 수금을 타고 퉁소를 부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

22. 또한 씰라는 두발가인이라는 아이를 낳았다. 그는 구리나 쇠를 가지고, 온갖 기구를 만드는 사람이다. 두발가인에게는 나아마라고 하는 누이가 있었다.

23.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말하였다. "아다와 씰라는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24.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였다. 마침내, 그의 아내가 아들을 낳고 말하였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죽은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나에게 허락하셨구나." 그의 아내는 아이의 이름을 셋이라고 하였다.

26. 셋도 아들을 낳고, 아이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하였다.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하였다.





1. 도입_박근혜 게이트와 그리스도인의 영성

한 목사님이 쓴 SNS에 글을 썼습니다.

더욱 주님만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박근혜대통령의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제 컬럼에 대하여 이런 상황에서도 영성일기 타령이냐?’ 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가 무엇을 답답해 하는지 충분히 압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할 일은 더욱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평소에 그리하지 못한 이들도 지금은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글의 앞부분만 읽어드렸습니다. 이 글이 논란이 되는 것은, 이 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현 사태에 대한 반응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성을 내면의 문제로만 한정짓게 된다면 개인적이고 초월적인 부분에만 관심을 갖게 되고영성을 전 삶의 영역으로 본다면 사회적 참여를 해야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신 분은 전자의 입장이 강한 것 같아서 이에 대해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다.

 

 이런 논쟁은 최근만의 일이 아닙니다. 일제 강점기 때도 그랬고7,80년대 격동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습니다.





2. 거스르기 힘든 경향성

본문 23~24절을 두 절은 라멕이라는 사람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공동번역>


아다야, 실라야,

라멕의 아내들아,

나를 다치지 말라

젊었다고 하여 나에게 손찌검 하지 말라

카인을 해친 사람은

일곱 갑절로 보복을 받는다면

내 말을 들어라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죽여버리리라

죽여버리리라

라멕을 해치는 사람은

일흔 일곱 갑절로 보복받으리라


그가 부르는 노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2.1. '힘의 자랑'입니다.

라멕은 지금 자신감 넘치게 노래를 부릅니다. 그는 결혼을 해서 두 명의 아내가 있는 사람이지만, 그가 상대했던 사람은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젊은이보다 라멕이 더 혈기왕성한 것입니다. 

그 젊은이가 라멕에게 상처를 입혔던 것 같습니다. 젊은이의 의도적 공격이었는지, 우연한 실수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그런데 여기서 라멕이 자랑하는 것은, 자신이 당한 만큼의 보복을 한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잔인하게 그의 생명을 빼앗아버린 것입니이다. '창상(상처)'은 타박상이나 멍이 들 정도

라멕은 자신의 분노에 대해서, 과잉대응해서 한 젊은이의 삶을 끝내버린 것에 대해서 망설임이나 가책이 없습니다. 단지 자존심이든 물리력이든,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에 대해서는 절대 참거나 용서해주는 미덕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2. 신 없는 세상

이것은 라멕에게 시범케이스 같은 것입니. 앞으로 그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더 험한 꼴을 당하리라는 엄포입니다.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라는 말은,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 형벌을 주시면서, 그럼에도 가인을 다른 보복으로부터 보호해 주겠다는 것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라멕은 자신을 해치는 사람은 77배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갚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 따위는 필요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 따위 믿느니 내가 나를 보호하겠다, 나는 충분한 힘이 있다는 것이겠죠.  힘 있는 라멕은 신의 존재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의 존재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3. 인간 문화의 방향성

우리는 여기서 인류 문화의 방향성을 보기를 원합니다.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는데, 그는 장막을 치고 살면서, 집짐승을 치는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인데, 유발은 수금을 타고 퉁소를 부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

22. 또한 씰라는 두발가인이라는 아이를 낳았다. 그는 구리나 쇠를 가지고, 온갖 기구를 만드는 사람이다.

20절부터보면, 가인의 후손들이 매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서 문화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매우 발달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음악을 하고 악기를 만들고 도구를 만들고 구리와 쇠를 다룰 수 있는 기술까지 보유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다윗 왕 때에 와서야, 그것도 블레셋의 기술을 다윗이 알게 된 후에야 쇠를 제련하게 된 것에 비해, 가인의 후손들의 기술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우월해 질 것을 기대합니다. 우리의 능력이 탁월해지고 전문성이 커져 갈 것이라 생각합니. 지금까지 내 실력으론 되지 않았지만 기도하면 잘하게 될 것이란 기대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거꾸로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만을 기대야 하기 때문에-최순실 사태로 최고의 스펙은 부모라는 것이 다시한번 드러났지만-사람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도리어 더 탁월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기도나 신앙의 힘과는 별개-반대가 아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문화와 기술이 결국엔 타인을 압제하고 자기의 힘을 과시하고 신()에게서 떠나는 데 도움을 주는 도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타인과 함께 더불어 살려고 하고, 신의 도우심을 구하는 사람들은 도리어 힘이 없고 압제를 받는 자리에 떨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특히 더 경계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조차 그런 논리들이 지배하는 것입니. 돈 많은 사람, 많이 배운 사람, 전문적 기술이 있는 사람, 리더십이 있는 사람, 아이디어가 좋은 사람 등 신앙과 상관없이 더 나은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더 빨리 직분을 갖게 되고 더 큰 권한을 갖게 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대안은 예배 공동체입니다. 

26. 셋도 아들을 낳고, 아이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하였다.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하였다.


아벨이 죽고 난 이후 하나님은 '셋'을 주십니다. 셋은 보상, 대체라는 뜻인데 그 셋을 통해 예배 공동체가 지속됩니다. 예배란 단순히 예배당 안에서 드려지는 종교예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힘이 아니라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가족 여러분,

지식은 축적되지만 지혜는 쌓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문명은 분명 발전되어가지만 사람은 발전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라멕의 때나 지금이나 힘으로 타인을 누르고자 하는 욕망은 모두 같습니다. 문화 역시 그런 욕망을 반영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문화는 답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 오직 하나님만이 답이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해 공평과 정의, 진리를 선포하고 촉구하는 방법을 통해서입니다. 이런 이중적인 면을 가져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우리 마당넓은교회 공동체는 이 땅의 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으로 이 땅의 힘을 대항하는 모습이길 소망합니다.